[메디게이트뉴스] 대한민국 보건의료 체계가 백척간두에 서 있다. 정부가 대대적으로 추진 중인 이른바 '의료 개혁'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깊은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리겠다며 내놓은 대책들이 본질적인 재정 총량의 확대나 구조 개혁 없이, 행위별 수가제를 억제하고 비급여를 통제하는 등 '의료 공급자 압박을 통한 비용 절감'에만 매몰돼 있기 때문이다.
건보 재정의 거시적 한계를 외면한 채 진행되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의 공급자 통제 정책은 다가오는 초고령 사회의 거대한 파고 앞에서 모래성에 불과하다.
정부의 일방적인 독주 속에서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해법을 찾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초고령 사회를 통과하며 최근 건강보험법을 전면 개정한 일본의 행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단행한 건강보험법 개정안의 핵심은 명확하다. 재정 절감과 구조조정의 책임을 의료계에 전가하는 대신, '국가의 재정적 책임 강화'와 '수요자의 합리적 분담''을 법제화한 것이다.
우선 일본은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 중 상장주식 배당 등 실질적인 금융소득을 보유한 '자산가 고령자'의 소득 자료를 금융기관이 정부 시스템에 온라인으로 의무 제출하도록 법제화했다.
근로 소득이 없다는 이유로 청년층과 같은 혜택을 누리던 자산가 고령자에게 '공평한 부담'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다. 이에 더해 환자가 약국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OTC)과 효능이 유사한 전문의약품의 건보 급여를 제한하거나 본인부담률을 차등화하는 등 무분별한 의료 이용을 억제하기 위한 '수요자 통제 기전'을 과감히 도입했다.
더욱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재정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국가의 전향적인 태도다. 일본 정부는 개혁 과정에서 발생할 의료계와 가입자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국고 보조 특례 감액 공제액을 상향하여 공적 재정 투입을 선제적으로 늘렸다.
아울러 지역건보의 누적 적립금인 재정안정화기금을 위기 시 과감하게 인출·전용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 보험료 폭등과 공급자 압박이라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선제적으로 차단했다.
반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일부 언론과 정부는 의료계의 정당한 정책적 비판을 '집단 이기주의'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하려 들지만, 이는 본질을 완전히 왜곡한 프레임이다. 의료계가 요구하는 것은 의사의 이익이 아니라, 정부가 방치하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의 '밑 빠진 독'을 먼저 고치라는 구조적 경고다.
현재 대한민국 건강보험의 누적 적립금은 약 28조 원 규모로 겉보기엔 안정적인 성적표 같지만, 가파른 고령화 추세를 감안하면 수년 내에 전액 고갈될 시한폭탄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에 명시된 건보 재정에 대한 ‘국고 지원 20%’ 규정조차 정부는 매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국가의 책임과 가입자의 합리적 소비 유도 정책은 실종된 채, 오직 의료기관 내부의 수가 조정과 패널티성 규제만으로 재정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인과가 뒤바뀐 발상이다. 이러한 '공급자 쥐어짜기'의 결과는 이미 현장에서 참담하게 나타나고 있다.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과 배후 인구 감소가 맞물리면서, 지방의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의료 인프라는 고사 직전에 몰려 있다.
국가의 재정적 완충장치와 구조 개혁 없이 공급자만 압박하는 정책은 결국 지역 의료의 공동화와 필수의료의 완전한 붕괴라는 부메랑이 되어 국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공급자 일방 통제 중심의 의료 개혁 기조를 전면 수정해야 한다. 일본의 사례처럼 건보 재정 안정을 위해선 국고 지원의 명문화와 법적 구속력 확보가 선행돼야 하며, 자산가 고령자의 실질 소득 반영 및 약제비 본인부담 구조 개편 등 수요자 측면의 합리적 개혁이 병행돼야 한다.
초고령 사회의 경고음은 이미 울리고 있다. 공급자의 곳간을 털어 연명하는 임시방편 대신, 재정의 국가 책임을 명확히 하는 근본적인 '정공법' 체질 개선에 나설 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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