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⑧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⑨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④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⑤김용진 경북의대 100년사 간행위원장·경북의대 병리학교실 교수
⑥이원주 경북의대 부학장·경북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
⑦정한나 경북의대 흉부외과학교실 교수
⑧김성중 경북의대 31대 동창회 수석부회장·대구 W병원 원장
⑨최병호 경북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⑩권정윤 경북의대 안과학교실 명예교수·뉴경대요양병원 원장
경북의대 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학창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필자의 학창시절은 1960년대다. 60여년전의 일이지만 그 때를 회상한다는 자체로도 감회가 깊다. 어렴풋한 옛 기억을 더듬어 추억의 시간들을 회상해 본다.
여말선초 야은 길재님의 회고가 중에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야은이 낙향해 은거하고 있던 중 옛 고려의 송도를 찾은 감회를 읊은 것으로서 세월의 무상함을 애절하게 느끼게 한다. 이 구절을 “인걸은 의구하되 산천은 간데 없다”라고 바꾸면 어떨까. 친구들은 아직 건재한데 추억의 옛터는 없어진 곳이 많다.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개발로 인해 너무 많이 변했다.
그 당시 산격동 경북대학교 캠퍼스는 몇 동의 건물 이 외는 가교사여서 복도를 걸어가면 삐그덕거렸다. 허허벌판, 나즈막한 야산에 띄엄띄엄 보이는 강의실, 황량하기까지 했다. 캠퍼스를 관통하는 비포장도로를 시영버스가 지나갈 땐 도로 주위는 온통 흙먼지로 뒤덮여 가로수가 뽀얗게 변했다. 지금의 경북대 캠퍼스와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광경이리라. 그때 우리 집이 비산동에 있었는데, 버스를 놓치면 논두렁길을 가로질러 한시간 정도 걸어가기도 했다.
전후 암담하고 황폐해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그때 새벽종이 울린다. '잘 살아보자' 외치며 허리를 졸라 매고 불굴의 의지로 살아내신 부모님 세대를 보며 우리들 가슴 속에도 희망의 불씨를 하나씩 피우고 살았던 것 같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GDP(국내총생산)를 보면 1960년대 약 1만3800원 정도였는데 2020년대에는 4003만원 정도로 무려 2900배나 증가하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다.
본관 건물에서 우측으로 약간 언덕 위에(아마 지금의 월파원?) 박물관이 있고 그 부속실 방 하나에 학생들을 위한 조그마한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언제나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었던 그 시절 유일한 낭만이었다.
예과 강의과목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교양과목으로 기초과학을 비롯해 법학, 사회학, 철학, 역사. 외국어(영어, 독일어, 불어 심지어 희랍어 특강도 개설)등이었으며, 그 당시 강의하신 교수님들은 지금도 명성이 높은 분들이셨다.
본과에서는 의학전공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설레기도 했는데, 계단교실 뒤쪽에 앉아도 교수님과 마주 보는 듯했다. 의학용어부터 생소해 낭만적이었던 예과와는 전혀 다른 살벌한 분위기에 저절로 압도됐다.
골학 구두시험을 칠 때 무서운 교수님 앞에서 사람 뼈 들고 떨면서 우물쭈물했던 했던일, 병리학 슬라이드 땡시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
본과 3학년부터 임상강의가 시작됐데 강의는 대부분 교수님들이 담당하셨다. 강의를 들을 때는 그냥 교수님(선생님)이셨지만, 4학년 임상실습을 나갔을 때 교수님은 하늘 같은 분들이었다. 질문이 있어도 직접 물어 볼 수 없어 레지던트 선생님에게 물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랜드 라운드 때 뒤꽁무니를 따라가다가 질문이라도 받으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꾸중도 가끔씩 들었다. 의과대학생이라고 폼 잡던 기개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어쩐지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강의 시간에 필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친구 중에 글씨체가 좋은 친구가 있어 교수님으로부터 강의 메모를 받아와서 유인물을 만들어 주곤 했다.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름종이에 철필로 쓰고, 그 다음 등사기에 기름종이를 얹어놓고 롤러에 잉크를 묻혀 문질러 주면 인쇄된 종이가 나왔다. 지금 같으면 컴퓨터로 간단히 메모하는 것을 원고를 받아서 정리하고 수동식 인쇄기에 등사해서 유인물이 손에 들어오는 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친구 덕분에 강의를 들으면서 필기하느라고 고생을 덜 했다고 생각하니 그 친구에게 고맙기도 하다.
매년 5월에 열리는 가든파티에서는 기초교실마다 교실 특색을 전시했다. 해부학교실과 병리학교실의 인체 표본 전시는 의과대학 축제 이외는 볼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다. 가든파티에 참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파트너 동반이었다. 당시 급하게 파트너를 구하거나 아니면 친구의 누나나 여동생을 대동하기도 했다.
졸업여행은 제주도로 갔는데, 부산에서 저녁에 출발, 제주에는 새벽에 도착하는(대략12~14시간 소요)긴 뱃길이었다. 제주 도착 후 배멀미의 정도에 따라 초토상, 미토상, 다토상이라는 재미있는 상도 있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을 더듬어 재미있었던 추억의 몇 장면을 회상해 보았다. 다소 간의 오류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마음속에 남아있는 그리움의 퍼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