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정부가 필수의료 지원에 속도를 붙이는 가운데 의료계에선 필수의료의 정의가 모호해 자칫 내부 다툼으로 번질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여러 과들이 필수의료임을 자처하고 나서면서 유관 학회간 경쟁이 과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분을 막기 위해 정부와 대화 창구를 단일화 해야 한다는 대한의사협회와 이에 부정적인 학회 간 갈등 가능성도 점쳐진다.
23일 의료계에 따르면 통상 필수의료는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년과를 뜻하는 의미로 쓰여왔다. 법적으로도 300병상을 초과하는 종합병원 이상의 의료기관에 대해선 이들 4개과 중 3개과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지난 2009년부터 외과와 함께 수가 가산을 받고 있는 흉부외과도 필수의료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의료계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면서 필수의료과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지고 있다. 실제 지난 몇년 간 전공의 지원율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은 비뇨의학과는 복지부와 필수의료과가 모여 대책을 논의하는 필수의료협의체에 비교적 최근에 합류하며 필수의료로 '인정' 받았다.
최근 복지부와 학회들 간의 필수의료 릴레이 간담회에서는 외과와 내과가 빠진 대신에 감염학회와 중환자의학회가 합류하기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과정에서 그 중요성과 열악한 여건이 주목받은 분야다.
환자 사망 사건 등이 발생해 사회적 이슈가 되면 정부가 부랴부랴 지원과 대책을 마련하는 경우들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번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을 계기로 부각된 신경외과다.
이처럼 필수의료의 범위가 널뛰기를 거듭하는 가운데 정부가 최근 필수의료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상황은 복잡해지는 양상이다. 의협은 의료계 내부적으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단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개별 과목의 학회들이 경쟁적으로 필수의료를 자처하고 있어서다.
실제 의협 이정근 상근부회장은 앞서 메디게이트뉴스와 통화에서 의료계의 ‘내분’이 발생할 수 있다며 정부와의 대화 창구를 의협으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학회 쪽에선 이 같은 의협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반박도 나온다. 현재 필수의료의 위기는 수가 인상에 더해 정책을 통한 제도 개선이 필요한데, 이런 목소리를 내는 데는 유관 학회의 정책 전문가들이 적격이라는 것이다. 과별 불평등 문제를 떠나서 정책에 실제 3차병원 현장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선 학회가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단 지적이다.
충북대병원 심장내과 배장환 교수(대한심장학회 보험이사)는 “현재 문제가 되는 부분들은 수가 인상만으론 해결이 불가능하다”며 “예를 들어 발생시 사망률이 높지만 환자 수 자체가 많지 않은 질환들의 경우 단순히 수가를 10배 올려준다고 해도 제대로 인프라가 갖춰지기 어렵다. 당직 제도, 거점 센터 운영 등 정책적 뒷받침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협에 수가 관련 전문가는 있겠지만, 모든 분야의 정책 전문가가 있진 않을 것이다. 학회들이 의협을 패싱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배후의 이런 복잡한 문제를 외면한 채 의협이 전담해서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애초에 필수의료와 비(非)필수의료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단 지적도 나온다. 특정 분야만 필수의료로 정의해 지원하는 것은 우리나라 의료시스템의 전반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단 것이다.
인천시의사회 조병욱 총무이사는 “말이 필수의료지,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의료시스템 상의 문제로 사망하는 환자들이 발생하는 분야의 의료를 필수의료라고 하고 있다”라며 “필수의료란 말은 망가진 대한민국 의료를 에둘러 축소시킨다. 한정된 분야에 비용을 조금 들여 보상해주는 척하면서 국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쓰는 말”이라고 꼬집었다.
배 교수 역시 “자의적으로 필수의료를 골라내고, 구멍난 부분만 메꾸는 땜질식 처방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결국은 전체 의료체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처방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