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 연구용역을 입수해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무면허의료행위임에도 의과의료기기 사용을 유도하는 듯한 문항과 더불어 인터넷에 떠도는 MRI(자기공명영상장치) 사진을 도용해 버젓이 문항을 만든 것 자체가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국가 재정 3500만원이 소요된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 공식 연구용역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기자는 곧바로 기사를 통해 두 차례 문제제기를 했고 이에 발맞춰 대한의사협회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의협 집행부와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측은 국시원을 직접 방문해 항의했고 정보 공개청구를 통해 최근 5년 치 한의사 국시 필기시험 문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공개된 기존 한의사 국시 문항은 더 가관이었다. 2022년 기준으로 한의사 국시 중 의과영역 관련 문항이 36.5%, 의과의료기기 관련 문항은 22.3%나 됐다. 이는 2018년에 비해서도 10%p 이상 더 늘어난 수치다. 심지어 문항엔 희귀난치성 질환, 유방암 등에 한방처방을 묻는 질문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비로소 이번 한의사 국시 연구용역에서 왜 이런 식의 문항 예시가 나왔는지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이번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의 안일한 태도에 있다는 지적이 많다. 엄연히 의료인 중 직역별 업무범위가 나눠져 있음에도 이를 고려하지 않은 문제를 수년간 출제한 것도 문제지만 이에 따른 문제제기에도 별다른 개선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엄연히 직무유기이며 상황에 따라선 의료법 위반 소지도 다분하다.
의료인 국시는 한 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시험이다. 기존 국시 출제 경향이나 향후 시험 방향성에 따라 예비 의료인들이 공부하는 방법과 각 직역 간 면허범위 등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정될 수 있다. 이처럼 중요한 시험의 문항이 일부 직역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국시원이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국시원의 과실은 충분하다.
의협도 법적 조치를 포함해 보다 강력하게 문제제기를 할 필요성이 있다. 지난 17일 최근 5년치 한의사 국시 문제 분석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에서 의협 한방대책특별위원회는 분명 이번 사태가 의료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봤다. 한의사 국시 문제 출제 경향이 무면허의료행위 및 무면허의료행위 교사 등 법률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이번 한의사 국시 사태는 명백한 의료법 위반 소지가 밝혀진 사안이다. 말로는 한의사 국시에 대한 전수조사를 요구하고 개선책과 책임자 문책을 주장하면서 의협이 기자회견 이후로 아무런 실질적 행동이 없다면 그 또한 허공의 외침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이번 한의사 국시 문제를 보도하면서 많은 이들의 의견과 제보를 받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의견은 "자신이 십수 년 전 의사 국시를 볼 때 출제 문항과 최근 한의사 국시 문제들이 거의 비슷하다"는 어느 의사의 발언이다.
의사와 한의사는 엄연히 교육 과정이 다르고 이에 따라 면허에 따른 업무범위도 별개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점차 의사와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기 위한 시험 문항들이 비슷해지는 현 실태가 찜찜한 것은 비단 기자뿐일까. 이번 사태와 관련해 국시원의 책임있는 태도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