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박민식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지난달 20일 세계보건기구(WHO)에서 탈퇴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첫 번째 임기 당시 재선에 실패하며 WHO 탈퇴를 현실화하지 못했던 트럼프가 이번엔 취임 초기부터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며 국제 사회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은 WHO의 최대 분담금 담당 국가로 연간 5억 달러(한화 약 7280억원)를 부담하고 있다. 여기에 자국의 우수한 감염병 및 공중보건 전문가들을 WHO에 파견해 팬데믹 대응 등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미국이 빠지게 될 경우 WHO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국제보건과 관련한 트럼프의 광폭 행보가 당장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 막연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개도국 국민들에겐 즉각적인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최근 트럼프가 제동을 건 75억 달러(약 11조원) 규모의 ‘대통령 에이즈 구호 비상계획(PEPFAR)’은 지난 2003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시작된 이래로 지금까지 최대 2500만명의 목숨을 구한 것으로 추산된다. 미 정부는 3개월의 일시 중지 기간 동안 이 프로그램을 지속할지 여부를 검토한다는 계획인데 그동안 치료제를 지원받지 못하는 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라이트재단) 이훈상 전략기획이사에게 트럼프의 WHO 탈퇴, PEPFAR 일시 중단 조치가 갖는 의미와 향후 국제 사회의 대응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WHO 재정∙전문 역량 측면서 타격 불가피…개도국뿐 아닌 전 세계에 영향
- 트럼프의 WHO 탈퇴는 국제 보건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나.
국제 보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빠져있다. 이미 관련 인력들이 해고를 당하거나 기금이 중단되는 등 광범위한 충격이 이어지고 있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래도 WHO의 탈퇴가 일으킬 파급 효과를 크게 3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지금까지 WHO 총회에는 전 세계의 보건부 장관들이 참여해 국제 보건과 관련한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왔다. 미국이 이 과정에서 빠지는 것 자체가 (국제보건 분야의) 큰 손실이다. 현실적으로 분담금 문제도 크다. 미국은 WHO 분담금 중 23%가량을 분담해 왔는데 그게 일시에 사라질 상황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전문 인력 문제도 얽혀 있다. WHO는 각 나라의 보건부로부터 인력을 파견 받는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WHO보다도 더 많은 양질의 감염병, 공중보건 전문가를 보유하고 있는데, 지금 그런 인력들에게 일시에 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미국의 WHO 탈퇴는 개발도상국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다. 글로벌 팬데믹 대응, 전 세계 암 정책의 기준 수립 등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줄 것이다.
- 트럼프는 2003년부터 이어져 온 ‘대통령 에이즈 구호 비상계획(PEPFAR)’도 일시 중지시켰다.
미국은 공적개발원조(ODA) 개념으로 개발도상국에 제공하던 PEPFAR를 비롯해 미국국제개발처(USAID) 등을 통한 직접 원조도 해왔다. 이런 식으로 전 세계 보건 원조의 4분의 1 이상은 미국의 자금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중에 미국이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게 에이즈와 말라리아 프로그램이다. 최근 중단한 PEPFAR의 경우, 에이즈 치료제 제공이 포함된 프로그램인데 에이즈 약은 매일 먹어야 환자가 사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프로그램 중단으로 당장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도국에서 흔히 발생하는 질환과 관련한 프로그램들의 붕괴가 심각하다.
이미 USAID에서 일하던 지인들 중 일부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WHO를 통한 글로벌 거버넌스도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양자 간 ODA를 통해 사실상 미국을 통해 돌아가고 있던 국제 보건 프로그램도 전면 중단된 것이다.
- 향후 팬데믹 대응에도 차질이 불가피해 보인다.
미래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메커니즘도 미국이 주도해 왔다. 예를 들어 세계은행(WB)의 미래 팬데믹 대비 기금의 큰 손도 미국이고, 관련된 기술적 리더십, 정치적 리더십도 다 미국이 잡고 있었는데 한순간에 공백이 생기게 됐다. 지금 미국 CDC, 국립보건원(NIH), 식품의약국(FDA) 등의 모든 프로그램이 중단됐고 국제적인 소통도 단절된 상태다. 거기엔 학술 저널, 연구개발(R&D) 비용 중단 등도 포함된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에이즈 같은 질병이나 글로벌 팬데믹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 감염병들에 대한 R&D 자금 중 상당 부분은 NIH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NIH가 흔들리면 감염병 치료제, 백신 연구개발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개발도상국의 아이들을 위한 필수 백신 R&D 기금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고, 미래의 팬데믹에 대응하기 위한 백신의 연구개발에 엄청난 투자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관련 예산도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사실 선진국의 제약사들이 잘 투자하지 않는 R&D 분야에 적지않은 규모의 예산에 있어 미국 NIH 연구개발 기금이 먹여 살렸을 정도인데 그게 대폭적으로 축소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백신을 사용하는 정책을 제시하던 CDC의 프로그램도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CDC를 관할하는 보건부 장관으로 지명된 케네디는 대표적인 백신 반대론자다. 물론 최근 청문회에서 자신은 백신을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과거 발언들이 있기 때문에) 이 말을 신뢰하는 이들은 적은 상황이다.
중국 향한 '불만' 경고성 조치 가능성도…韓 포함 국제 사회, WHO서 역할 늘려야
- 첫 번째 임기 당시엔 재선에 실패하며 WHO 탈퇴가 무산됐다. 다시 탈퇴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뭘까.
트럼프의 WHO 탈퇴는 중국이 WHO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불만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WHO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컸는지에 대해선 논쟁이 있지만 트럼프는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국제주의자가 아닌 트럼프가 WHO를 미국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내린 경고성 조치일 가능성도 있다. 2~3년 후에 다시 가입할 수 있지만 우선 충격을 주기 위해 내놓은 전략일 수 있다.
에이즈 지원 프로그램 중단의 경우 미국의 강성 보수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프로그램에는 콘돔을 사용해 안전하게 성관계를 하라는 메시지 등도 포함돼 있는데, 미국의 기독교 보수권 일각에선 아예 결혼 전에는 성관계를 하지 않겠단 선언을 하라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보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지금 일시 중단된 프로그램이 말라리아나 결핵이 아니라 에이즈인 건 그런 부분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PEPFAR의 입안자는 보수당인 공화당의 부시이기도 하고 그래서 보수 기독교적 가치관 하에서 미국 국민들의 세금이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가 국제보건 분야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될까.
아마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입장에서 WHO 분담금을 통해 세계 보건에 기여하고 개발도상국을 돕는 건 ‘아메리카 퍼스트’가 아니다. 앞으로는 모든 프로그램을 미국 중심으로 운영하고 돈도 미국 국민을 위해 쓰겠다는 걸로 보인다. 트럼프가 안보를 중요시하고 미국 국민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요소로서 보건 분야에 일정 정도 투자를 유지할 것이란 의견은 있다. 하지만 1기 트럼프 내각에서 전통적인 보건 분야 전문가들이 기관장을 맡았던 것과 달리, 이번엔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보건부 장관으로 지명한 걸 보면 미래를 예단하기 어렵다.
- 트럼프의 행보가 국제보건 분야에 미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제 사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기본적으로 미국의 WHO 재가입과 적정 수준의 개도국 대상 원조 프로그램 유지를 촉구하는 게 중요하다. 이미 국제보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이 얼마나 수용될지는 미지수지만, 미국의 공백을 다른 나라들이 완전히 대체하긴 힘든 게 사실이다. 단순히 미국 정부가 빠지는 수준이 아니라 미국이 보유한 모든 전문가 그룹의 역량과 예산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결국 미국의 기여가 줄어들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다른 나라들이 나서야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캐나다, 일본 등 전통적 선진국은 물론이고 한국의 역할도 과거보다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분담금을 조금씩 더 늘리는 건 물론이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미국의 리더십 공백을 채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이끌면 다른 나라들이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형태였다면, 이제는 각 나라가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오히려 우리나라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의사결정 거버넌스의 공백에서 우리나라처럼 존재감이 적지 않은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목소리를 내주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