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키워드 순위

    메디게이트 뉴스

    진정한 의료개혁, 의대 2000명 증원 무효화하고 의료제도부터 뜯어고치자

    [칼럼] 박인숙 울산의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기사입력시간 2024-09-19 02:43
    최종업데이트 2024-09-19 02:43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대통령 발 의료재앙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됐고, 슬프게도 사람들 사이에 ”아프지 마세요, 다치지 마세요, 넘어지지 마세요“가 일상의 인사말이 됐다. 정부는 여야의정협의체에 기대를 거는 모양인데 이것도 크게 기대할 것이 못된다. 교수들이 대학을 떠나고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탈당한 젊은 의사들은 의대증원 철회와 근본적인 개선책이 없는 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의료재앙이 단 시일내에 끝날 것 같지 않고 장기화가 불가피해 보이는 지금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의료개혁’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의료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할 때이다. 우물쭈물 하다가 ‘필수의료 패키지’ 처럼 공무원들이 만들어서 의사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의료개악’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현장경험이 풍부한 의사들이 선제적으로 마련해서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의료서비스는 1977년 처음 건강보험제도를 도입한 이후 점차 진화해서 전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내에 1989년부터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 혜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최근의 의료재앙 전까지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리한 정책 추진으로 인한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됐고 매번 의사들의 양보와 희생이 강요됐다.

    정부나 의사 모두 이를 알면서도 고치기 보다는 급한 불만 끄고 보는 땜빵식으로 대처해왔고 그 결과 수많은 제도적 모순, 문제들이 쌓여왔다.
     
    지금 우리 의료체계의 근간이 되는 골격은 과거 대한민국이 가난했던 시절 날림공사로 급히 지은 부실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다. 아파트도 약간 망가진 경우는 리모델링해서 살수 있으나 기반구조부터 부실이 심하면 완전히 부수고 새로 지어야 한다. 수가를 찔끔 올려준다고, 몇몇 필수과 전공의 월급을 조금 올려준다고, 일시적으로 응급수당, 분만수당을 준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의대 정원 늘린다고 해결될 일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그동안 국민소득이 꾸준히 높아지면서 이제는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같은 기간 중 국민들의 의식 변화, 4차산업 혁명, ‘신인류’라고도 부르는 MZ 세대의 등장, 실손 보험 급증, ‘이상한’ 판결에 따른 사법 리스크 폭증, 등 엄청난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고 이런 변화가 의료서비스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과거부터 누적돼왔던 문제들이 더욱 악화하면서 의료서비스 자체가 오래된 빌딩처럼 이미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쏘아 올린 2000명 증원이라는‘미사일’한 방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부실건물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껏 세계 최고라는, 겉은 화려하지만 내면은 사상 누각과 같았던 우리 의료가 한방에 폭삭 내려앉은 결과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의료재앙이다.

    이와 같이 이제껏 위태롭게 버텨오던 ‘시한폭탄’과도 같았던 대한민국 의료서비스가 대통령 한마디에 완전 멈춘 지금이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의료를 기초부터 완전히 뜯어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지난 수십년간 세상이 너무나 많이 변했고 의료 현장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수 십년 전 내가 어린이 환자들을 열심히 볼때는 다른 의사들도 대부분 그랬듯이 환자 또는 아이들 부모와의 관계가 좋았다. 간혹 감사편지, 꽃, 케이크 선물을 받을 때도 있었고 심지어는 아이가 사망한 후 수고했다고 전화나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부모도 있어서 가슴 속으로 함께 울었던 기억도 있다.

    나 뿐 아니라 환자를 살렸을 때의 뿌듯함, 소위 ‘바이탈 뽕’에 취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어려운 시간을 보낸 의사들도 많다. 그런데 의사와 환자 간에 고마워하고 서로 배려하는 정서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고마워 하기는커녕 의사를 고발하거나 보건소에 민원을 넣거나 SNS에 각종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올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수십년 전 가난했고 의료 수준도 낮았고 교통도 불편했고 사보험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국민 인성도 지금과 매우 다른, 그런 시절에 만들어진 의료제도는 지금의 정치, 경제, 사회상과는 맞지 않는다. 시대정신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래서 낡은 의료제도를 이제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 과감한 의료개혁을 통해서만이 필수의료, 지역의료를 살리고 국민건강을 지키며 국민 의료비 절감, 그리고 건보 재정이 지속 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다.
     
    의료개혁 관련 주요 이슈들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요약해 본다.

    1.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구조 개선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대한민국 의료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정책들을 최종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의 구성원 분포가 이렇게 비상식적인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구성원 분포를 반드시 고쳐야 한다. 독일 제도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2. 지나치게 낮아 원가에도 한참 못 미치는 건강보험수가 인상이 필요하다. 특히 필수의료 수가는 반드시 인상돼야 한다.

    3. 현재 심각하게 왜곡된 의료전달체계를 선진국을 벤치마킹하고 정상화해 수도권으로의 쏠림과 지방의료기관의 동공화를 해소해야 한다.
     
    4. 같은 맥락으로 현재 진행중인 수도권 대형 대학병원들의 6000여 병상 추가 계획은 중단하는 것이 맞다.

    5. 1979년에 만들어진 요양기관의 당연지정제는 의료환경, 사회환경이 천지 개벽할 정도로 변한 지금 재검토가 필요하다. 

    6. 의료진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응급실 문제도 인근 응급실들 간의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효율성을 높이고 의료진 번아웃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경증, 주취자, 난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방지책이 필요하다. 주취자 전용 응급실을 운영하는 나라는 한국 이외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우리나라와 달리 선진국에서는 병원 내 난동자들을 엄하게 형사처벌한다.

    7. 각 전문과의 전공의 수급도 지금처럼 병원 경영에 필요한 숫자대로 정할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인구분포와 질병분포에 따라서 특정분야 전공의 숫자를 산출해서 유연하게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전공의 수련제도도 개선돼야 한다. 이들의 인권 보장 및 낮은 임금도 고려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각 수련병원에서의 수련의 질도 보장돼야 한다.

    8. 의학교육의 질을 보장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정치권 마음대로 ‘엉터리의대’ 신설을 막기위해서 의학교육평가원(의평원)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의평원 구성원에’ 훼방꾼‘이 진입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9. 공공의료, 공공병원, 공공의대에 대한 개념이 현재 대단히 잘못돼 있다.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이 ‘공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민간의료와 다르지 않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민간의료기관과 경쟁하는 공공의료기관의 운영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나아가 ‘공공’은 선, ‘민간’은 악이라는 매우 잘못된 개념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10. 정부가 국립의료기관과 사립의료기관을 차별해서 지원하는 것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이런 차등지원은 없애야 한다.

    11. 실손보험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 국민 대다수가 가지고 있으나 과잉의료이용을 부추기며 의료생태계를 교란시키고 건보 재정을 고갈시키는 문제가 날로 커지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소관업무가 아니라고 논의 의제로도 올리지 않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다.

    12. 급증하고 있는 자동차보험 한방의료비 지급제도를 고쳐야 한다. 국토부 관할 업무라면서 보건복지부가 방임하는 것은 국민건강을 총체적으로 책임져야 할 보건복지부의 직무유기이다.

    13. 한방의료관련 제도도 대수술이 필요하다. ‘몸 버리고 돈 버리는’ 불상사가 무한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아가 한의학의 표준화, 정량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이 참에 임상시험이 면제되는 ‘황당한’ 한약서 10종(제작연도 1431년~1901년)에 대한 법 개정도 필요하다.

    14. 보건복지부는 보건의료기본법에 명시된 대로 매 5년마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2010년 이 법이 처음 제정된 이후 어떠한 정권도 이를 지킨 적이 없다. 보수 건 진보 건 모든 정권에게 보건의료를 정책 우선순위에서 낮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와 같이 정부가 기본 임무는 하지 않으면서 매번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불쑥불쑥 내어놓은 정책들 때문에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정책은 누더기가 됐다.

    15. 의료정상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지난 십 여 년에 걸쳐서 급속히 나빠지고 있는 사법 리스크로 필수과 의사들이 현장을 떠나는 가장 큰 원인이 이것이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법조인들이 의료에 대한 이해도가 낮고 의사들에 대한 왜곡된 정서 때문이다. 고의성 없는 의료사고에 대해 의사를 형사처벌하는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고의성 없는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처벌은 없애야 하고 불가피한 의료사고의 경우도 보상금은 국가책임으로 해야 한다. 이에는 법개정이 필요한데 의사들이 국민, 법조인, 정치인,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계몽과 집요한 설득 작업이 필요하다.
     
    이 모든 개혁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조건들로 첫째 의사들이 통일된 목소리를 반복적으로 내야 하고, 둘째 국민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 하고, 셋째 정치력을 키워야 한다.

    물론 이 모두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런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국민을 포기하는 것이고 의사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상황을 보면 앞으로 이 의료 재앙이 최소한 10년 이상, 비관적으로 보면 영구히 회복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가 될지,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향후 협상에 대비해 의사들이 정답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의료개혁의 시발점은 의료재앙을 촉발한 의대정원 증원을 원천 무효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의사들은 국민들께 증원의 부당함을 이해시킬 의무가 있다. 만약 정부가 끝내 의대정원 2000명 증원을 고집한다면 개혁은커녕 어떠한 논의도, 어떠한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 참으로 슬프고,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하다. 열대야가 아니라 분노로 잠 못 이루는 시절이 언제 끝날까.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