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김웅철 칼럼니스트] 일본에서는 ‘치매’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국민적 합의를 거쳐 2004년부터 치매를 공식 용어에서 추방했다. ‘치매’(癡呆)라는 한자어가 갖는 부정적인 이미지(어리석고 미련하다) 때문에 치매환자들이 차별적 대우를 받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민 공모를 통해 ‘인지증’(認知症)이 치매를 대체하는 공식 용어로 선정됐고 이후 정부와 시민들의 노력에 힘입어 인지증이라는 용어가 자연스레 정착됐다. 이제 일본에서 인지증은 감추고 싶은 가족의 질병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인성 질환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역 곳곳에 있는 ‘인지증 카페’에서는 치매환자 본인 및 가족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함께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스타벅스와 같은 유명 커피체인도 정기적으로 ‘인지증 카페’ 이벤트를 열기도 한다.
인지증에 대한 기본연수를 이수한 ‘인지증 서포터즈’가 2017년에 1000만 명을 넘어섰고, 편의점 등 일반 마트의 직원들도 인지증 환자의 접객 노하우를 몸에 익힐 정도다. 인지증 환자가 세차 등과 같은 단순한 노동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 일하고 최근에는 인지증이 있는 고령자들이 스포츠 동호회를 만들어 각종 운동을 즐기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 이처럼 ‘인지증의 일상화’가 실현되고 있는 것은 치매에서 인지증으로의 용어의 전환이 큰 역할을 했다는 데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이런 가운데 요즘 일본에서 또다시 인지증 관련 용어를 교체하자는 논의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번에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배회’(徘徊)라는 말이다.
몇몇 지방 정부에서는 이미 공식 문서에서 ‘배회’라는 용어의 사용을 금지했다. 배회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 목적 없이 어슬렁거리며 이리저리 돌아다닌다’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인지증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환자 본인이나 가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용어라고 인지증 환자 가족과 시민단체들은 주장한다. 인지증 환자의 외출에는 상당부분이 본인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으며 따라서 배회라는 용어가 그 실태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거다.
돗토리(鳥取) 시는 지난해 7월부터 원칙적으로 공문서에서 배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의 보건사가 “인지증 고령자에게도 산보나 장보기 등 외출의 목적이 있다. 다만 기억력이 떨어져 길을 헤매는 것일 뿐 ‘배회’라는 말이 갖는 의미와 다르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시 차원에서 검토 결과 보건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후 지자체의 행사 용어나 문서에 ‘배회’를 ‘혼자 걷기’ 등으로 바꿔 쓰고 있다.
후쿠오카 현(福岡県) 오무타 시(大牟田市)는 2015년 ‘안심하고 배회해도 되는 거리’라는 지역 슬로건을 ‘안심하고 외출 가능한 거리’로 변경하면서 지자체 가운데 가장 먼저 ‘배회’라는 말을 추방했다.
같은 해 효고 현(兵庫県)도 ‘배회’라는 용어 사용을 중단했고 이듬해에는 도쿄 구니타치 시(国立市)가, 지난해에는 아이치 현(愛知県) 오오부 시(大府市)가 배회라는 말 대신 ‘외출 중에 행방불명이 되다’ 또는 ‘혼자 걷다가 길을 헤매다’ 등의 대체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인지증 지원 시민단체는 “배회라는 말은 인지증 환자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하대하는 언어로, 환자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인지증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라며 용어 교체를 크게 환영하고 나섰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아오모리 현(青森県)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배회’ 대신 ‘홀로 산보’나 ‘혼자 걷기’ 등의 사용을 검토했지만 ‘행방불명’이라는 긴급 상황의 성격을 시민에게 전달하는 데 ‘배회’라는 용어가 유효하다고 판단해 사용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 현의 담당자는 ‘혼자 걷기’ 와 같은 말로는 인지증 환자가 행방불명된 상황이 가볍게 인식될 수 있어 오히려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 용어 교체에 난색을 표했다.
일본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 전국 경찰에 접수된 인지증 행방불명자는 1만 5863명으로 5년 전에 비해 1.7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2025년이면 인지증 환자가 7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어 인지증 행불자의 수는 더 증가할 전망이다.
한편 일부 언어학자들은 배회를 ‘길 잃은 고령자’라는 용어로 바꿀 것을 제안하기도 해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몇 년 전부터 뜻 있는 시민단체 몇몇이 ‘치매’ 용어 추방 캠페인을 펼쳐왔다. 과거에 쓰던 망령, 노망이라는 단어에서 지금의 치매라는 단어가 정착하기까지 많은 유식자들의 노력이 있었듯 이번에도 많은 시민단체와 구성원들이 뜻을 함께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문재인 정부가 치매 정책으로 ‘치매국가 책임제’를 들고 나오면서부터 치매 용어 퇴출 운동이 사그라 들었다고 한다. 정부가 정책용어로 ‘치매’라는 말을 사용한 만큼 용어 퇴출 운동의 방향성이 상실돼 버린 것이다. 정부 정책 용어의 선택이 사회 인식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정책용어 사용이 신중해야 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