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대통령실이 29일 다시 의정갈등 해결을 위한 공을 의료계 쪽으로 넘겼다. 대통령실은 이날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위에 ‘의료인력 수급 추계기구’를 신설하고 위원 과반을 의사 단체 추천인으로 앉히겠다고 했다.
10월을 앞두고 정부가 나름 파격 제안을 해왔지만 의료계에선 해당 제안을 사실상 수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사자인 의대생, 전공의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 빅5병원 사직 전공의는 메디게이트뉴스에 "정부가 의료계를 끌어들여 당장의 비판만 면피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내년 의대증원 논의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대화는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관계자도 "2025년 의대증원 재논의가 우선"이라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은 젊은의사들을 의식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의협 등 의료단체들의 내부 사정을 감안해 이번 추계 기구 신설 카드를 꺼낸 것으로 풀이된다. 의료계가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을 지속적으로 던지면서 '의정갈등 해결을 위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주체는 의료계'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것이다.
정계 상황에 정통한 의료계 관계자는 "적정한 의사 수를 상설 기구를 통해 추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의료계도 동의한다. 다만 현재 대통령실이 추계기구를 강조하는 이유는 현재 대화 전제의 핵심 쟁점인 2025년도 증원 문제는 쏙 빼고 '의료계 주장을 수용했으니 대화에 참여해달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전략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의사인력 수급 추계기구 신설은 사실 처음 나온 얘기가 아니다. 지난 7월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내용에 '의료계의 입장을 폭 넓게 반영하겠다'는 메시지가 강조된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대통령실은 추계 기구가 여야의정 협의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어느 정도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를 의식한 정무적 판단이 깔려있다는 것이 의료계 내 여론이다.
한 대표가 내놓은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안이 주춤한 사이, 추계 기구가 신설되고 일부 의료단체라도 참여하면 의정갈등 해결의 공은 한동훈 대표가 아닌 대통령과 정부에 돌아가게 된다.
이와 관련, 의협 관계자는 "한동훈 대표의 여당과 추경호 원내대표의 여당이 전혀 다르다"며 당내 한 대표 견제가 상당하다고 했다. 의료계 관계자도 "의정갈등 해결 과정에서 여당 대표와 대통령 사이 신경전이 상당하다"며 "추계기구에 의사를 과반수 포함시키겠다는 제안은 갈등 해결의 중재를 놓고 주도권 경쟁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말했다.
만일 과반수 의사가 참여하는 추계 기구가 신설되더라도 의사들이 원하는 정원 조정은 이뤄지기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수급추계전문위원회는 추계결과를 보고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기능만 있을 뿐, 인력정책을 결정 하는 것은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의협 조병욱 대의원은 2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의사들의 요구대로 추계기구는 만들어줬지만 그것을 토대로 인력 수급 정책을 결정하는 상위기구를 또 만들어서 무력화하는 방법을 만든 것"이라고 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