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제40대 대한의사협회 최대집 회장 집행부가 출범 2년차를 맞았다. 취임 초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탈퇴로 중단된 수가협상에 대한 일부 회원들의 강도 높은 비판과 탄핵 분위기가 조성됐던 임시대의원총회를 거쳤다. 어느새 의료계 1년 농사 중 하나인 2020년도 수가협상 시즌이 도래했다. 4G를 지나 새롭게 맞는 5G 시대만큼이나 세월이 참 빠르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수가협상은 치열한 과학적, 합리적 논리 싸움이 아닌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보인다. 원래부터 과학처럼 보이는 가짜 과학이 바탕이 된 허수(虛數)에 의한 상대가치점수에 대한 환산지수(아마도 ‘환상지수’가 더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라는 것을 정하는 축소된 정치 싸움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진행돼 온 속칭 수가협상은 어떻게 보면 의료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위한 협상이 아니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의사의 총 수입 관련 자료를 선점한 상태에서 수가협상을 진행한다. 즉,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한쪽이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협상 아닌 협상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건보공단은 출발부터 근거로 포장된 양 근거 없는 상대가치 점수를 놓고 미리 정해 놓은 범위 안에서 밀고 당기는 공정치 않은 경기 운영 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이는 노동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이른바 ‘노동의 진정성(authenticity)’과 무관하게 숫자화한 자료를 놓고 벌이는 일종의 ‘협상 쇼’다. 출발부터 균형이 깨진 수가협상은 말만 ‘협상’이지, 건보공단과 전문직 간의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비춰진다.
건보공단, 원가 이하 의료수가 인정하지 않고 정확한 원가 자료 요구만
공단이 발주한 연구결과에서도 우리나라 의료수가는 원가 수준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는 사실이 실증적 결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단은 이를 인정하기는커녕 의료계에 정확한 원가계산 자료만을 요구하고 있다.
공단은 국민건강보험료의 징수로 발생하는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대규모의 연구원과 연구비를 쏟아 부으며 공단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의료단체가 주장하는 정량적 자료에 대응해 공단은 월등한 연구 인력과 자료획득의 독점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공단의 정량화된 숫자 놀음에 의료단체가 맞서기는 절대로 녹록할리 없어 보인다. 그래도 의료계가 과학적이고 정확한 자료를 산출해 제시하면 혹시라도 극심한 경영난 해결에 도움이 될까하고 합리적인 협상과정과 결과치를 기대하곤 한다.
그럼에도 아무리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해도 정부 측 협상단의 의무는 의료비 통제와 의료비 절감으로 무장돼 있다. 이들은 소위 의료노동 가치에 대한 의도적 부정과 붕괴되어 가는 의료체계를 생생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쇠로 일관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제도를 국민을 위하고 보장성을 강화한다는 논리로 포장하되, 수가협상의 궁극적 목표가 의료비 통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단이나 의료계 모두 수가협상이 마치 근거중심 협상으로 보이게 하는 기술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실상 수가협상은 처음부터 근거중심 협상에서 거리가 멀어져 있다. 근거 이전에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얄팍한 술수와 방법론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부는 근거와 가치기반 의료를 강조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 노동 가치에 대한 근거기반 정책이 변질됐을 때 당연히 의료의 모습은 이에 따라 건강하지 못하게 변질된다. 변질되고 건강하지 않은 의료제도는 의료소비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긴다.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의료보다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미약한 ‘퀵서비스 배달 형태의 의료’로 기형적 모습을 갖게 될 것이다.
건강한 의료제도, 진찰 중심의 일차의료에 무게 둬야
건강한 의료제도는 마치 균형 있는 건강한 생태계처럼 건강하고 튼튼한 일차의료를 갖고 있다. 일차의료가 발달해야 의료비의 감소 그리고 ‘낭비형 의료’를 막을 수 있다. 성공적 일차의료의 핵심은 진찰을 기반으로 의사 자신이 직접 환자와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며 펼쳐가는 기본적인 의술의 구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세계 어떤 나라도 일차의료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거나 저버리는 나라는 없다.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의사회(WMA) 등 지구촌 모두 의료 생태계의 가장 근본이 되는 건강한 일차의료의 역할과 기능을 추구하고 갈망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정부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복합적인 의료의 난제를 풀어볼 의지도 없어 보인다.
건강한 의료제도에서 가장 기본인 일차의료의 출발은 환자와 의사의 인간적 만남의 출발이다. 병든 의료제도를 고치기 위한 첫 단계로 진찰료 정상화를 주장해도 가진 자가 더 많이 가지려 한다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논리’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물론 더욱 원색적 표현은 국민이 낸 피와 같은 돈을 퍼(?)줄 수 없다는 기막힌 근거기반 응대로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직도 정부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사회참여형 의료에서 공단이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사용하는 자금은 분명 의료단체에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 국민의료라는 단어에는 사용자, 공급자 모두의 발전을 위한 공공의 영역이며 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미 권력화한 공단은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소중한 보험료의 소유가 공단 소유인처럼 자유롭게 운용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전체 관리비에 투입되는 예산만해도 1조원이 넘고 있다고 한다. 건강보험제도의 무임승차와 할인승차, 그리고 이것에 대한 해결방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지속가능한 재원확보 방안이 없는 보장성 강화는 앞으로 더욱 더 탈법 및 편법적 무임승차만을 부추길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가협상놀이에 숫자로 된 근거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협상 후의 후유증에 대한 씁쓸하고 차가운 우려로 연결된다. 이번 수가협상의 결과에 따라,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해 2% 대, 3% 대, 아니면 4% 대의 수가협상 성적표(?)에 따라 의협 회장과 집행부의 탄핵 임계점이 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자병법에서 가장 우선은 전쟁은 하지 않을 수 있으면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했다. 민주화 사회에서 협상이라는 단어가 잘 살려지기를 기대해본다. 그러나 건정심의 구조나 수가협상의 구조가 이미 민주적인 구조는 아닌 것도 사실이다.
수가협상, '의사수입 총액' 운운하는 불안정한 상황만 감지될 뿐
올해 수가협상 테이블에서도 ‘아직 의사는 살만하다‘는 의사수입총액 자료에 의한 공단의 근거제공과 의료노동에 대한 가치를 주장하는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리라 전망된다. 아니면 흔히 쓰는 ‘의사의 급여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되돌이표 시그널로 무한 반복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전문직 자유업에 대한 급여를 사회적 합의로 결정되는 직종이 어디 있을까. 이는 아마도 근거가 취약할 때 주장하는 억지 수법들이다. 수가협상은 노동 가치에 대한 협상으로 수입총액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숫자 놀음이다.
의사수입총액이 근거가 되기 힘든 이유는 적정노동시간과 자본투입에 대한 명확한 산출과 계산이 일반 노무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의 파업 위협에 사용자 측은 평균 노동자의 연봉수준이 거의 억대에 가깝다고 근로자를 비난한 적이 있었다. 이에 맞서 잔업과 야간, 휴일 근무로 얻은 연봉 총합이지 적정근로에 의한 수입은 아니라고 맞받아쳤다. 의사들이야말로 주당 40시간을 지키는 의사는 거의 없다. 모든 개원가에서 토요진료는 기본이고 야간 진료에 저수가로 어렵다며 365일 진료하는 의사들도 많다.
적정한 수가협상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뚜렷한 재원 확보 방안 없이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무장한 제2, 제3의 문재인케어가 정권마다 창궐한다면 나약한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골병이 든 채 머지않아 붕괴될 것이다. 그리고 의료 생태계가 처참하게 망가질 것이다. 극소수 대형 병원들만 살아남기 위해 닥치는 대로 돈 되는 CT, MRI 등 고가 장비를 24시간 풀로 가동해 마치 기계소음으로 가득 찬 공장지대처럼 한국 의료 생태계는 흉물스럽게 변해갈 것이다.
의료야 망가지든 말든, 의사들이야 죽든 살든 간에 정부는 큰소리로 외치는 듯하다. “원가파괴 의료세일 문케어! 국민 여러분, 많이많이 이용하세요!”라고.
수가협상의 최종시한은 5월 마지막 날 자정이다. 매년 반복적이지만 올해 역시 수가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매우 불안정한 상황만 감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