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고령화와 함께 증가하는 의료비로 건강보험 재정 위기가 커지는 가운데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를 위해 진료비 지불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건보재정 위기 속에 현재 행위별 수가제가 아닌 총액계약제로 이행하자는 주장이 사실상 나온 것이다.
의료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2000년대에 도입한 행위별 수가제 중심 방식이 진료량 증가 및 과잉 투자 유인으로 작용하며 부작용을 발생시키고 있는 만큼 '상대가치점수-환산지수계약' 체제 대신 새로운 지불 보상 결정 기전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건강보험노동조합이 15일 오전 10시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건강보험의 미래와 진단, 행위별 수가제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에서 이 같은 주장이 나왔다.
현재 우리나라는 진료에 소요되는 약제 또는 재료비를 별도로 산정하고, 의료인이 제공한 진료행위 하나하나마다 항목별로 가격을 책정해 진료비를 지급하도록 하는 행위별 수가제(Fee-for-Service)를 주 진료비지불제도 유형으로 삼고 있다.
행위별수가제는 의료인이 제공한 시술 내용에 따라 값을 정해 의료비를 지급하는 것으로 2001년 '상대가치점수-환산지수계약 체제'를 도입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행위별 수가제', '의사인력 부족'이 건강보험 인상 야기 주장…"진료비 지불제도 개편해야"
이날 발제를 맡은 연세대 의료복지연구소 정형선 소장(연세대 보건과학대학원 보건행정학과 교수)은 이를 '2000년 체제'라고 명명하며 "당시 제대로 된 상대가치점수 초기 설정에 실패한 이후 상대가치점수가 수시로 인상되면서 재정 중립 원칙이 훼손됐다. 매년 2% 대 환산지수계약은 의료 단가 인상을 통해 복리 인상률에 따른 건보 진료비의 폭등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정 소장은 "환산지수인상률은 유형별 계약 이후 2008년 1.94%로 시작해 2% 이상의 인상이 지속되고 있다. 20년간 복리로 곱해지고 있다. 매년 2%대 인상으로는 지속 가능성이 없다"며 "다른 인상 요인과 동시에 작동하면 건강보험지출이 8~9% 증가하게 된다. 2003년도까지만 해도 보험료가 3.9%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7%가 넘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실제로 2010~2020년 건강보험지출 연평균 증가율은 8.7%였는데, 이를 분해해 보면 수가인상률은 상대가치점수 2%, 환산지수 2.1%로 4.1%였으며 1인 진료량 증가율 3.8%(1인진료인수 1.2% + 1일 진료 강도 2.7%)로 수가 인상의 영향이 약간 더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정 소장은 "또 2003~2007년 사이에 진행된 의대 정원 축소로 인해 의사가 부족해지면서 의사 고용계약 단가가 상승하고, 병원은 경영 압박을 받으면서 의료 질 저하와 건강보험 인상을 초래했다"고 의사 인력 부족도 건강보험 지출 증가 요소라고 언급했다.
그의 지적대로 우리나라 전체 경상의료비 규모는 2000년 GDP 대비 4%에 못 미치는 25조원에서 2022년 GDP 대비 10% 수준에 다가서 200조원으로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정 소장은 "전체 의료비를 적정 규모로 유지하는 것이 제1 과제이고, 본인 부담 수준을 정교화하면서 전체 부담은 낮춰 건강보험 보장 수준을 높이는 것이 제2의과제다. 본인부담률을 평균적으로 낮추는 것보다는 필수성의 정도에 따라 본인부담률의 높낮이를 차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 소장은 의사 인력 부족이 의료 질 저하와 건강보험 인상을 초래한 만큼 의대 정원의 확대를 통해 의료인의 면허독점을 완화해 의료제공체계의 유연 탄력성을 높여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구체적인 개편안은 2000년 체제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재정중립적 환산지수 인상률을 자동산출하는 기전을 도입하는 방안과 2000년 체제를 폐기하고 환산지수계약 대신 고시가 수정방식을 도입하는 방안 등 두 가지였다.
정 소장은 "2000년 체제를 폐기하는 방식은 매년 반복되는 환산지수 계약 기전을 폐기하고 기존 상대가치점수를 기준으로 고시가를 주기적으로 조정해 가는 방식이다. 대신 전문가 의견을 받아 전체 진료비 증가율 범위 내에서 필수의료 등을 추가 보상해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건강정책참여연구소 김준현 소장 역시 행위별 수가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행위별 수가제는 진료량과 연동해 상환금액이 결정된다. 그래서 진료량 증가 및 과잉 투자의 유인이 작용하게 되고, 의료의 질이나 보건의료 성과 향상하기 위한 정책적 개입이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이러한 지불제도하에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국민 1인당 의사 외래 진료 횟수 14.7회로 최상위에 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잉의료에도 우리나라 국민은 의료서비스에 대해 높은 의료비, 치료 결과 미흡, 필요 이상의 진료 등으로 불만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국민의 과잉진료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환자들은 환자가 과잉 이용한다는 측면보다 의사들이 과잉 진료를 하는 게 문제로 보고 있었다. 또 의료기관의 진단 결과를 신뢰할 수 없어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는 행태가 발생하고 있고, 실손보험으로 인해 불필요한 의료를 이용하는 사례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김준현 소장은 "현 정부는 영상검사 등을 중심으로 한 환자의 의료 남용이나 과다이용 문제를 제기하며 문재인 케어를 타깃으로 삼았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비용의 무한 증식과 과잉 투자를 초래하는 공급구조에 있다"며 "행위별 수가제가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비급여 부문을 축소시킬만한 효과적인 통제 수단이 부재한 것도 원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김 소장은 "지출 부문 통제는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에 방점을 두고 추진해야 한다. 실제적인 추진 전략이 담긴 진료비 지불제도 개편 로드맵을 제시해 국민 및 이해 당사자에게 정부의 실행 의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과잉진료' 원인으로 '행위별 수가제' 지적…복지부 "2차 건보종합계획에 반영 고려"
뒤이은 토론에서도 현 정부의 건보 재정 건전성 강화를 위해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계획을 재점검하는 방식의 개혁에 비판을 제기하며, 현 행위별 수가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셌다.
민주노총 이정훈 정책국장은 "의료의 질 등 가치기반 없는 보장성 강화와 급여인상은 공급자 보상기반 확대만 야기하므로 건강보험 지불제도 개편을 통해 가입자 보험료 인상 억제, 가입자 의료부담 완화, 지속 가능한 재정기반, 의료의 질 향상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국장은 "상대가치 점수 및 총점 변동분을 재정중립관점에서 조정해 지역조정계수 등 기존 지불제도의 단점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복수의 지불제도를 적용하는 방식이 우선적으로 적극 추진해야 한다"며 "비급여 관리 및 퇴출과 혼합진료 금지 등 비급여 문제 대책도 병행돼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조희흔 간사도 "우리나라는 어떤 나라보다 병원이 많고, 원하면 의사를 볼 수 있지만 높은 의료비를 지불하면서도 의료서비스에 대한 만족도는 그렇게까지 높지 않다. 이는 실제로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 공급자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서비스 제공량을 늘리고, 고가 장비를 사용하고, 환자의 내원 일수를 늘리고 있어 시민들로 하여금 과잉진료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진료량에 비해 효과가 미미해 치료 만족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조 간사는 "지불제도 개편 논의의 필요성이 계속해서 대두됐으나 그간 의료 공급자와 관계돼 있는 기업, 보험사의 반발로 제대로 된 개편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이는 민간 중심 의료체계에서 행위별수가제가 의료 공급자들이 이윤 추구 목적에 부합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적극적 개편 의지를 보이지 않고 되려 건강보험 재정 위기를 국민이 자초한 것이라며 책임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부가 정말로 건강보험 지불제도 개편을 위한 칼을 빼들었다면, 단순히 행위별 수가제를 보완하는 방식의 지불제도 개편이 아니라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과 시민의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 강준 의료보장혁신과 과장은 "의료이용 과다, 의료비 증가 등의 문제는 의료 공급 체계뿐만 아니라 건강보험체계와 이를 둘러싼 실손보험 등 다양한 방향에서 논의하지 않으면 풀기 어렵다"며 "정부는 오는 9월에 2차 건강보험종합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향후 5년이 중요한데 지불제도 개편제도를 포함해 다양한 내용 담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강 과장은 "행위별 수가제도가 도입된 것은 의료 접근성을 보완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다. 이제는 의료의 질과 비용효과성도 고민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시대적 요구에 맞게 행위별 수가제에 대한 보완 필요성에 공감한다"며 지불제도 개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